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불은 흙을 뿌린다.

텍스트

by rncntrjin 2022. 10. 24. 05:32

본문

여름이 지나갔다.
어떤 단어들은 여러 문장을 쓴다. 첫 줄을 적고 나서 스물을 셀만큼 동안 갖가지 모양의 지나간 여름이 스쳐갔다.
단순 산술적으론 하나하고 절반의 해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직은 이 기간이 내 평생을 뭉갤만큼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21년 봄 이전의 일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10년 전 치룬 수능시험과 비슷한 농도와 화질로만 남아있다.
일차원 수직선으로 연혁을 표시하면 끊어진 21년 4월부터 여태까지에 물결 표시를 둘을 세워야겠다.

하려던 말은 이런게 아니라, 고 쓰는 순간 첫줄에 이미 다 적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날이 손바늘이 될 만큼 무의식에 그어뒀던 기점이 지나서. 지나갔음을 관망할게 아닌 내 의지로 끝내 피 묻고 살점 박힌 밧줄로 끌고 와서 이렇게 문장을 적고 있다고.

분명 푸른 반짝임으로 시작했던 화마가 좀처럼 진화되지 않고 종국엔 온몸의 뉴런과 세포에 백린이 옮겨 붙었다. 불은 더 큰 불을 다시 더 큰 불을 다시 더. 매번 최대로 과감하게 저지선을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불길이 더 매서웠다. 떡잎부터 잎맥 한줄한줄에 새겨 키웠던 백척 나무는 윗가지부터 무릎높이까지 재가 되었다. 형태만 남은 밑동을 매일매일 쳐다봤다. 폐포가 그을렸다. 끌어안고 울기도 했고 부러진 가지로 목을 찌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몇번 불길을 뚫고 들어왔던 손들은 결국 제 팔을 끊어야했다. 내 손끝에서 그 팔에 불이 옮겨 붙을 땐 차라리 마지막 뿌리까지 모두 끊어 뒤로 엎어지고 싶었다.

나는 향을 피우 듯 초를 켜 듯 기도하는 마음으로 남은 풀에 먼저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온 대륙을 뒤덮었지만 다 괜찮아졌다. 재가 토양이 될거란 사실을 더 잘 알아보기로 했고 믿기로 했다.
그사이 불은 별이 되었다.

결국 지금의 세상이 시작된건 모두의 염원 덕이었다. 별의 덕이기도 했고. 시작되었다고, 사실 끝난 적도 없다는 믿음 덕이기도 했다.
낙원을 두지 않게 되었고 확실한건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사랑이란 말이 못내 고까워져서 그 바깥에 삶이라는 이름으로 칭칭 감아두었다.
다정함이 세상을 살린다는걸 이제 더 알 것도 같지만 전보다 힘을 싣기는 어려워졌다.
대신 그만큼 다른 땅에 미지의 온기가 심어졌으리라 믿는다. 좋은 것만 보고 거기에 눈길을 애써 잡아둔다.

태형이 말처럼 무튼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

관련글 더보기